6월이면 생각나는 ‘이 사람’
6.25가 낳은 불세출의 ‘한국전쟁영웅 김동석’ 스토리
맥아더원수, 리지웨이, 백선엽 대장과 함께 미정부 선정 4대영웅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옛말이 있다. 특히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특출한 인물이 등장해 용맹을 떨치며 국난을 평정한 사례가 자주 있었다.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장군, 당태종과 양만춘 안시성주, 임진왜란과 성웅 이순신, 청산리대첩의 이범석 장군 등등......
우리역사에는 이런 사례가 많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가 낳은 불세출의 전쟁영웅이며 북파공작원의 대부인 김동석 전 HID 36지대장을 조명한다.
이글은 기자생활을 통해 가장 잊을 수 없는 분으로 각인된 그분 생존시 여러차례의 면담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2009년 3월26일 86세로 영면해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잠드신 님의 명복을 빈다. <편집자 주>
별 달지 못한 유일한 대령출신 전쟁영웅
1950년 초 여름날 새벽 북한군의 남침을 시발로 53년 7월27일 휴전 때까지 3년1개월간 삼천리금수강산을 초토화하며 남북간에 처절한 혈전을 벌인 6.25전쟁.
이 기간중 미국정부가 선정한 4명의 전쟁영웅이 있다. 맥아더 원수, 리지웨이 대장, 백선엽 대장 등 3인은 한국전 당시 사령관과 참모총장을 역임한 5성, 4성장군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장군 아닌 영관급이 한사람 끼어있다. 그가 바로 김동석 지대장이다. 그는 모든 군인의 꿈인 별을 달지 못하고 대령으로 예편한 인물이다. 장군이 아닌데도 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 까지는 엄청난 비화가 따른다.
6.25가 터졌을 때 그는 육군중위로 보병부대 중대장 이었다. 전쟁기간 중 특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두 차례나 특진해 소령을 달고 육군첩보부대 (HID) 36지구대장을 맡았다. 영화 실미도를 본 사람은 그들의 임무에 대해 다 알고 있는 북파공작대가 바로 그가 이끈 부대다. 36지대는 원산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섬 여도에 둥지를 튼 여단규모 부대였다. 적진에 수시로 침투해서 각종정보 취득은 물론 특수시설물 파괴, 요인 체포 등 적을 교란시키는 특수임수를 수행하곤 했다.
1.4후퇴 직전 북한을 도와 전쟁에 투입된 중공군 6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확인됐지만 그 후 그들의 동태는 전혀 아군 정보망에 걸리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가 몹시 긴장하며 중공군의 동태를 챙기느라 부산을 떨었지만 허탕을 치곤했다. 그때 김 지대장이 대원들을 이끌고 직접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중공군장교를 생포했다. 그를 회유함으로서 비밀정보를 캐내는 것은 물론 그들의 주둔지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중공군은 모든 병사가 9일분의 식량(빵과 생선 말린 것 등 간이식)을 휴대하고 참전했다. 낮에는 아군에 노출 되지 않도록 숲속에 숨어서 자고 밤에만 전진하는 올빼미작전을 펴며 극비리에 서울점령을 노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정보를 면밀히 분석한 맥아더 장군은 치밀한 작전으로 그들을 섬멸함으로써 한국전 개전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UN군 10만명 이상-전투기조종사 수십명 피해 막아
만일 중공군이 그들 작전대로 한강을 넘어 서울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피아간에 수많은 접전이 벌어졌다면 엄청난 피해가 따를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UN군 장병 최소 10만명 이상, 미 공군 전투기조종사 수십 명의 희생을 막고 전투기 수십대를 구했다는 게 미군측 분석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8군사령관 마크 M 클라크대장의 회고록: 한국전쟁비사 -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에 잘 나타나 있다. 클라크장군은 2차대전 당시 소장으로 직접 낙하산을 타고 이탈리아, 프랑스 적진에 침투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지원한 용장으로 첩보전과 유격전의 베테랑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때 한국군 HID36지대가 시도 때도 없이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 후방을 끊임없이 교란하자 크게 신경이 쓰인 인민군은 제7군단과 6군단을 원산근처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어 김 지대장과 대원들의 활동이 결과적으로 적 병력을 최전방에 집결하지 못하게 분산시켜 그들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아군의 작전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고 극찬했다.
김 지대장의 전적은 6.25 개전초기부터 화려하게 이어진다. 육군 17연대 3대대 11중대장으로 낙동강전선 안강-기계 전투에서 인민군 1군단(무정군단) 선봉대를 괴멸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전사에 길이 빛날 이 전과로 17연대 장병전원 1계급특진이란 영예를 누린다. 패장이 된 적장 무정은 중장에서 전사(이등병)로 강등되는 치욕을 맛본다.
또 17연대 3대대장으로서 해병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으로 참여해 최초로 서울 땅을 다시 밟는 역사의 증인이 된다. 중국군 생활로 중국어에 능통한 그를 맥아더사령관이 직접 선정하여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서울수복작전에 투입한 것이다.
한국해병대는 서쪽으로 한강을 건너 마포-연희고지를 거쳐 중앙청으로 진격하고 그가 이끄는 육군은 삼각지-용산을 지나 남산을 공격 동부서울을 장악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어 계속 펼쳐진 평양점령 작전에도 맨 먼저 투입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김 지대장은 이런 공로로 대한민국정부가 주는 훈장과 미국 동성훈장, 리더십 훈장 등 모두 27개의 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쟁 중은 물론 휴전 후에도 미군 장성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그들과 교분이 두터운 자랑스런 한국군이었다.
주한 UN군사령관이나 사단장으로 취임하는 지휘관마다 부임 후 가장 먼저 그를 찾아 인사하고 협조를 부탁하는 게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사실은 장군출신이 아닌데도 6.25전쟁의 영웅으로 미국정부가 그를 뽑았고 극진히 예우하는데서 기인한다.
한국주둔 미2사단에 흉상-기념관 설치 그의 공적 기려
특히 의정부에 주둔했던 미2사단(인디언해드 패치, 캠프 클라우드, 평팩으로 이전하기전 주둔)의 예우는 한마디로 대단했다. 미2사단이 어떤부대인가?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참전(라이언 일병구하기에 나선부대) 했으며 6.25 한국전쟁이 터지자 1주일만에 가장먼저 부산에 상륙했던 부대다.
평양입성 때 김일성집무실을 점령해 인민기를 노획한 세계최고 정예 보병사단이라 긍지가 대단한 부대가 바로 2사단이다. 그런 부대가 사단본부 한쪽 전쟁기념관 앞에 김 지대장의 흉상을 세워 오가는 장병들이 경의를 표하며, 기념관 안에는 김동석 영웅관을 별도로 설치 운영했다.
또 해마다 12월 16일을 김동석 영웅데이로 정하고 이날은 공휴일로 전체 장병이 휴무하며 그의 공적을 기린다. 한국군 정보부대에도 그의 기념관이 마련돼 후배장병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김 지대장은 생존시 기자와 만나 여러 얘기를 나눌 때 “생사를 함께했던 옛 전우들이 휴전 후 지금까지 세상을 많이 떴다. 한 사람 한 사람 유명을 달리할 때마다 현실적 제한 때문에 상관으로써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너무나 부끄럽다”면서 “옛 전우들의 공적을 겨우 감사패 하나에 담아줄 뿐”이라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특히 휴전직후 인민군 장성을 생포하는 등 전공이 뚜렷한 신유덕 공작대장이 2004년 5월 작고했을 때 더욱 그랬다고 옆 전우들이 들려주었다. 아끼던 부하를 보내는 그의 안타까움은 뒤늦게 보상관련법이 만들어져 다소 해소됐고 그도 이런 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6.25때 소년병으로 입대해 현역시절 김 지대장의 부관을 지냈고 50년 이상 측근에서 보필한 최인연 예비역중령(10여년전 작고)은 기자와 가깝게 지내던 시절 그와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러면서 “김 지대장은 책임감이 강하고 능력있는 지휘관으로 부하를 끔찍이 아꼈던 청사에 길이 빛날 투철한 군인이었다”며 “현재도 미국 군부, 중국 군부로부터 가장 대접받는 한국군의 원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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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석 지대장 그는 누구인가?
일본군에 강제 징집-장개석군-팔로군 거친 첩보전의 베테랑
중공군 60만 섬멸의 결정적 역할, 전쟁 중 2계급 특진
미 군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지휘관 부임땐 꼭 인사
김동석 지대장은 러시아연해주에서 1923년 망명객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나라잃은 슬픔을 가슴에 안고 일제의 핍박을 피해 집단망명을 했던 것. 1943년 하얼빈고교를 졸업하고 무도전수학원 재학 중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근무하다 해방을 맞아 장개석 국민당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후 황포군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치고 소령으로 임관하게 된다.
중국군대서 조선족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뜻밖에도 일본군장교로 포로가 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일권 장군을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 그들과 교분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모택동군대인 팔로군에 포로로 잡혀 총살형을 받기에 이른다. 총살직전 “지휘관인 나는 죽어도 좋으나 부하들은 살려 달라”고 간청하자 사형집행책임자가 그의 용맹과 부하 사랑하는 마음을 가상히 여겨 그를 살려주고 강제로 팔로군에 편입시켰다. 당시 사형집행관이 훗날 판문점 휴전회담 때 북측 차석대표로 나온 이상조다.
팔로군에서 기회만 노리던 그는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탈출, 한국으로 오게 된다. 해방 후 고국에서 육사8기생으로 입교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5.16 쿠테타 직전 대령 (당시 김종필 등 동기생들은 중령)달고 동해안 방위사령관으로 재임 중 거사에 동참하라는 박정희소장의 권유를 받았으나 자신은 오로지 국방에만 충실하겠다며 거절한다. 이런 일로 인해 그는 쿠테타가 성공한 후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군 생활을 접고 대령으로 예편하게 된다.
동기생가운데 가장 승진이 빨랐고 후일 틀림없는 참모총장감이라 여겨지던 그가 별을 달지 못하고 군복을 벗게 된 것. 5.16 후 몇 달 쉬다가 과거 그의 도움을 받았던 박정희장군의 배려로 행정공무원으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5.16참여 거부 예편, 공무원 지내…유명가수 진미령의 아버지
초임지가 강원도 내무국장, 이어 삼척군수, 속초시장, 강릉시장, 목포시장, 수원시장, 경기도북부출장소장을 거쳐 함북지사를 지냈다. 25년에 걸친 공직생활은 한결같이 성실하고 근면하게 임했다. 군에서나 행정직에서나 그의 성품은 다를 바 없었다고 주변 인사들은 말한다.
60년대 초 삼척군수 시절 큰 수해를 당해 위문단이 현지를 방문 했을 때다. 그중 한명이었던 모윤숙 시인은 웬 젊은 홍보요원이 브리핑을 잘하더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이 군수여서 놀랐다. 또 그가 군 출신이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는 후일담도 있다.
그 만큼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일에 성실했고 자기 일을 부하들에게 떠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공직생활을 마감한 후에는 한미친선골프회장, 국제문화협회 상임고문 등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펼쳤다. 유도9단이며 국제심판인 그는 용인대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는 평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베어 서울송파구 문정동 소재 조그만 빌라에서 살았다. 그 집을 방문한 토마스 A 스츠워츠 전 미8군사령관이 “좀 돕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안타까와 했을 정도로 청빈했다고 부하들은 들려준다.
유명가수인 진미령씨 (본명 김미령)가 이 분의 딸이다. 노년의 그는 옛 전우와 후배들을 비롯해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인사 1천여 명이 만든 ‘영웅 김동석후원회’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노 영웅의 단한가지 소망은 어떻게 하면 7~80대 황혼기에 접어든 옛 전우들이 삶에 대한 기본적 걱정 없이 노후를 보장받도록 하는 것과 또 젊은 후배전우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위해 노심초사 했다.
이런 생각으로 2005년 가을 회고록 ‘이 사람 (This man) 김 동석’을 펴냈다. 6.25전쟁 발발시점부터 휴전 후 5.16쿠테타에 이르기까지 육군첩보부대를 직접 지휘한 경험을 기록한 자서전은 숨겨졌던 북파공작원들의 애환과 비화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This man이란 전쟁 중 김 지대장의 정보를 신뢰한 맥아더사령관이 그의 사진을 보며 이 사람이 귀한 정보를 제공 했다고 지칭한데서 그 용어를 책제목으로 사용한 것이다.
<최원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