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식 - 汎 崔氏의 연원과 빛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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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식 - 汎 崔氏의 연원과 빛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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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8.04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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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식<최씨범대종친회 총재>

 

 

최양식 총재 약력 

1952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남, 중앙대학교 행정학과, 영국리버플대 행정대학원 석사, 

행정고시(20회), 행정자치부 제1차관 역임, 경주대 총장, 민선 경주시장 두차례 지냄,

현재는 남양주시에 거주하며 저술활동과 고전 번역 작업.

6부전 : 경주 6부 촌장을 모신 사당
신라를 건국한 경주 6부촌장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경주 6촌은 북천 북쪽 알천양산촌(경주 이씨), 남천 북쪽 돌산고허촌(경주 최씨), 월성 동쪽 취산진지촌(경주 정씨), 모량천 유역 무산대수촌(경주 손씨), 북천 북쪽 백률사 부근 금산가리촌(경주 배씨), 보문사 부근 명활산고야촌(경주 설씨)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주요 성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최양식 최씨범대종친회총재가 경주시장으로 재직할 때 단장한 것이다.

 

▣우리나라 姓氏 살펴보기

우리나라의 성씨는 1960년을 기준으로 모두 258개 성씨가 있으며 김씨, 이씨, 박씨, 최씨, 정씨의 순인데 이들 5대 성씨가 우리나라 전체 성씨의 50%에 달한다. 우리 최씨는 200만명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성씨는 씨족사회가 부족사회 등으로 성장발전하면서 그 혈통관계를 구분하기 위한 방안으로 활용되었다. 

古代에는 성씨와 이름은 한자가 아닌 우리의 고유한 이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한자씩 표기의 성씨가 그리 흔하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말과 고려 초에 이르러 조정과 귀족중심으로 먼저 한자식 성씨를 일부가 사용하게 되고, 특히 중국 및 인접국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점차 성명을 한자음으로 표시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에게 까지 성씨의 사용이 확대된 것은 조선조 중기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이 성씨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 族譜(족보)이고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族譜學(족보학)이다. 

 

▣ 崔씨의 始原/ 得姓 

신라 육부촌장의 한 분이신 突山 高墟村長이신 蘇伐都利(소벌도리) 공께서 楊山의 蘿井 숲사이에서 알을 얻게되고 거기서 준수한 동자를 얻어 赫居世(혁거세)라 칭하였다. 후일 혁거세가 13세 되던 해에 육촌장들이 회의를 열어 서라벌의 始祖王(시조왕)으로 추대하였다. 

신라 건국후 88년이 지난후 3대 儒理王(유리왕)9년(AD32년)에 육부촌장들에게 성을 내렸고(賜姓) 이때 突山高墟村을 沙梁部로 개편하고 姓씨를 崔氏로 하였다.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3년에 소벌도리(蘇伐都利)공을 文烈王에 追封하였다.

✱ 三國史記 新羅本紀

​신라의 시조왕의 성씨는 박씨이고 휘는 혁거세이며, 전한 효선제 오봉원년 갑자년 4월 병진일에 즉위하시니 호를 居西干이라하였고 그때 나이는 13세였다. 국호는 徐羅伐(서라벌)이라 했다. 

▣ 新羅代의 姓氏 사용

신라초기에 賜姓이 육부촌장에게 이루어졌으나 당시 사회는 骨品制(골품제)가 지배하고 있던 사회였고 각종 古碑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일반 서민들은 종전의 우리 고유의 이름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得姓이후 800여년이 지난 경문왕 14년에 소벌도리공의 24세손인 고운 崔致遠(최치원) 선생의 입당과 함께 중국에서도 崔氏가 알려지게 되었다. 

​* 孤雲선생 이전에 分貫된 派는 開城, 朔寜, 東州, 全州(郡玉 系) 등 오랜 연원을 가진 최씨이고,

* 고운선생 이후에 분파된 파는 咸陽, 淸州, 永興, 龍岡, 水原, 扶安, 江陵, 江華, 和順, 通川, 陽川, 原州 등이 있고,

일찍이 古朝鮮의 遺民이 山谷사이에 六村을 이루어 나누어 거하였다. 첫째, 閼川 楊山村, 突山 高壚村, 취산 珍支村, 茂山 大樹村, 金山 加利村, 明活山 高耶村이다.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參 國號徐羅伐 先時 朝鮮遺民 分居 山谷之間爲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 그 支孫에서 分貫된 파는 海州, 晉州, 全州(均系) 등이다. 

* 그리하여 이름난 선조를 모시고 각 지역에서 파를 형성하게 되어 지금은 83개 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聖孫들은 나날이 번성하고 있 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몸을 바쳐 구한 자랑스러운 성씨 이다. 

 

▣ 성씨의 分貫과 分派

본관은 주로 지역명칭을 기초로 호칭하며, 분파는 주로 벼슬을 하거나 따로 세력을 형성한 일족의 首長을 중심으로 派設된다. 

그러나, 분관과 분파는 성씨의 분열현상으로 볼수 없으며, 近族을 중심으로 한 族親의 새로운 結束作用을 의미한다. 

그러나 分派意識에 埋沒되어 그 궁극적 淵源을 잊게 되면 성씨의 근본을 상실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崔氏 만개의 지파는 모두 한뿌리이며, 백 개의 파는 하나의 淵源에 歸一한다. (崔氏 萬枝同根 百派一源) 

 

▣ 자랑스런 조상들

​- 始祖이신 소벌도리(蘇伐都利)공은 신라 건국의 아버지이시 고, 신라를 구성하는 육부촌장의 한분이셨고, 

고운 (崔致遠)선생은 東方儒學의 祖宗으로 불리시고, 崔承祐, 崔彦撝선조 역시 입당하여 당의 과거에 급제하고 문명을 드날린 三崔로 불리는 자랑스러운 분이시다. 

​고려조의 문신, 崔承老, 崔沆, 崔沖, 崔惟淸, 최윤의(崔允儀, 1102~1162), 崔宗峻선조는 고려조를 대표하는 碩學 巨儒들이다.

倭寇를 정벌하고 외적과 싸우며 나라를 구하고, 고려를 위해 마지막까지 절의를 지키신 崔瑩장군도 자랑스러운 최씨 武將이시다. 

朝鮮朝에 들어 와서도 崔鳴吉, 崔壽峸, 崔萬理, 崔恒 선생은 모두 名臣이고 저명한 學者이다. 

水雲 崔濟愚선생은 事人如天, 人乃天의 不世出의 東學思想을 창도하여 세계의 정신사에 큰 방향을 제시하신 어른이다.

면암 崔益鉉 선생은 나라를 위해 절의를 지키며 순절하신 고결한 선비이다. 

한국적 그러나 보편적인 資本主義의 典型을 개척하고 독립운동을 해 광복의 결실을 이루어낸 최부자의 정신은 인류의 고귀한 자산이다. 이분들이 바로 우리 최씨인 것이다. 

 

▣ 앞으로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와 중국 사서와 산곡속에 숨어 있는 선조들의 자랑스런 유적과 빛을 당당히 찾아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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